자이스 역사

  • 자이스 그룹 역사
  • 기술 역사
  • 1846 - 1884

    자이스의 시작

    1846년 11월 17일, 30세의 정비공 칼 자이스(Carl Zeiss)는 예나의 노이가세 7번지에 작업장과 작은 상점을 열었습니다. 탄탄한 이론 지식과 훌륭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예나대학교(University of Jena)의 과학자 및 수학자와도 친분이 있었던 칼 자이스는 불과 몇 개월 만에 고객을 확보하고 과학용 기기를 수리하거나 고객이 요청한 사양에 따라 장비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경, 화학 저울, 제도 기구, 망원경 등도 제작했습니다.

    1847년, 칼 자이스는 사업 성공에 힘입어 조수와 견습생을 고용하고 바그너가세 34번지에 작업실 두 개를 임대했습니다.

    1847년 여름 자이스는 스승이었던 식물학자 마티아스 야콥 쉴라이덴(Mattias Jacob Schleiden)의 조언에 따라 단순 현미경을 제조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1847년 9월 칼 자이스는 첫 번째 저출력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1850년대 초부터 자이스 작업장(Zeiss Workshop)에서 만든 관측 장치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현미경 사용자들 간에 자이스의 정밀한 기술에 대한 좋은 평판이 이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복합 현미경만이 과학자와 의료 전문가들이 원하는 높은 배율의 확대 기능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심이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광학 시스템 제작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시행 착오 방식을 활용했고 특히 자이스는 광학 시스템의 개별 요소를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장이 원하는 장치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857년부터는 자이스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합 현미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1860년대 중반 자이스는 예나대학교의 물리학 강사였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를 설득해 현미경 대물렌즈 설계에 관한 수학 공식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본인이 개발한 측정 장비로 렌즈의 기본 요소를 작업 과정에서 미리 검사해야 한다는 아베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베는 현미경 제작 공정을 광학 작업 공정과 기계 작업 공정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1860년대 말 아베는 광학 시스템 계산으로 눈을 돌려 5년간의 연구 끝에 개구의 크기를 늘리면 현미경의 기능이 완벽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물리학자인 아베는 빛의 파동성 때문에 빛의 파장보다 절반 이상 작은 미세 구조를 인식하는 데 자연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을 통해 아베는 광축 주변 영역의 선명한 이미지를 기준으로 삼은 사인 조건에 관한 공식을 발견했습니다. 극도로 복잡한 이론 작업과 실험으로 인해 자이스 작업장은 모든 생산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습니다.

    현대식 광학 장비 설계의 시작

    아베의 이론을 바탕으로 제작한 현미경은 곧 세계적인 전문가들로부터 인정 받기에 이릅니다.

    1876년 아베는 자이스가 운영하는 광학 제작소(Optical Workshop)의 익명 동업자가 되었습니다.

    예나에서 생산되는 관측 기기의 판매 시장이 성장하면서 회사 수장으로서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던 아베는 생산 여건을 전면 쇄신하기로 결정하고 1880년 초 예나 외각에 훨씬 더 넓은 새 생산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광학 기기 제조소는 마침내 작고 아늑한 이미지를 벗어 던졌고 1880년대 말에는 자이스의 총 직원 수가 360명에 달할 만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이스와 아베의 지원을 받은 예나의 유리 화학자 오토 쇼트(Otto Schott)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기술을 이용한 광학 유리 생산에 성공했다는 점은 광학 제작소에 있어 특히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1884년 9월 쇼트 & 젠(Schott & Gen.) 유리 제작사가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광학 유리의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아베가 개발한 이론의 장점이 자이스의 광학 기기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문: 1996년 튀링겐의 지역 정치 교육 센터(Regional Center for Political Education)가 발행한 간행물에 수록 원문 저자인 볼프강 뮐프리델(Wolfgang Mühlfriedel)과 에디스 헬무트(Edith Hellmuth)의 배려 깊은 동의를 얻어 이곳에 재수록)

  • 1885 - 1945

    예나에 칼 자이스 창립
    1880년대 말 48세의 아베는 본인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보호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베는 자이스 작업장이 뮌헨의 정밀 기계 및 광학 연구소와 동일한 운명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정밀 기계 및 광학 연구소는 물리학자이자 유리 화학자였던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의 지휘로 큰 성공을 거두며 유명세를 탔지만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가 사망하자 상속자들이 재산을 나눠가지면서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염려한 아베는 칼 자이스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인 1889년 칼 자이스 재단(Carl Zeiss Foundation)을 설립하고 본인 몫의 광학 제작소 자산을 이곳으로 옮긴 데 이어 1891년에는 예나의 유리 제조소 자산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896년 에른스트 아베는 재단 산하의 회사들이 어떤 유형의 비즈니스를 수행해야 하고 그로 인해 창출된 수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정을 재단에 적용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아베는 재단 산하의 회사들이 영구적으로 과학과 기술에 주력하고, 핵심 인력이 평생 회사에 몸담으면서 첨단 정밀 기계 및 광학 기기를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편, 예나 대학교의 모든 과학자들이 재단 산하의 회사를 위해 협력할만한 여건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재단 기금은 대학 연구소 설립, 교수 후원 및 연구 프로젝트 장려에 사용되었습니다. 회사 수익의 상당 부분은 기존 제품의 개선 및 신제품 개발에 사용되었습니다.

    소유 조건이 남다른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인식, 훌륭한 전문가 교육, 예나의 제품은 매우 특별하다는 긍지 및 풍부한 사회적 혜택 덕분에 회사가 직원의 가족과 사회의 권리마저 존중해준다는 사고방식이 수십 년 전부터 직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이스의 분위기로 인해 정치 집단이 직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이것이 자이스 직원은 "노동 귀족"이라는 견해를 형성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재단의 규정에 따라 직원들에게는 법적으로 유효한 사회적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구성원은 합의한 최저 임금이나 월급을 받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금액 감축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해마다 직원들은 회사가 거둔 수익에 따라 임금이나 월급 이외의 성과금을 받았고 6일의 연차 유급 휴가도 사용했습니다.

    불가피하게 강제 해고가 이루어진 경우 해고된 직원에게는 퇴직급여가 지급되었고, 1875년에는 회사에 의료 보험 혜택도 도입되었습니다.

    40세 이전에 입사한 직원 중 5년 이상 재직한 직원에게는 장애수당이나 퇴직수당 수령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1900년 자이스 작업장(Zeiss Works)은 당시 독일 기업으로는 드물게 8시간 근무제를 도입했습니다.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
    1880년대 후반 아베는 창의적인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회사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개인적으로 필요해서 아베가 제작한 굴절계와 분광계를 시발점 삼아 1890년 창설된 광 계측기 부서는 다수의 기기를 추가로 개발했습니다. 이런 기기들은 광 측정 파라미터를 토대로 투명한 고체나 액체 성분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한편, 식품 산업과 의약품 산업에서 활용된 데 이어 1920년대부터는 금속 공학 산업과 금속 가공 산업까지 그 활용 범위를 넓혔습니다. 또한 광 계측기 부서는 거리 측정기와 사진측정 장비도 생산했습니다.

    한편 1890년 창설된 영상-광학 부서는 창설 첫 해에 최초의 영상 광학 렌즈를 시장에 선보였고 십 년간의 부단한 연구 끝에 1902년에는 카메라의 "매의 눈"이라고 불리는 테사(Tessar) 렌즈가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이 범용 카메라 렌즈는 여러 가지 다른 버전으로 추가 개발되었습니다.

    1894년 “망원경” 부서가 가세하면서 쌍안경 생산성이 급성장해, 1900년 1월에만 20,000대의 쌍안경이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여러 국가의 군대가 자이스의 구조용 망원경, 잠망경, 쌍안경을 사용했습니다.

    1900년대에 접어들자 1890년대에 “천문” 부서가 개발한 천체 망원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천문대의 의뢰로 최초의 대형 반사 망원경을 제작한 데 이어 인스부르크 전문대의 의뢰로 가장 강력한 천체 망원경을 제작하면서 천문학계에서 자이스 작업장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1908-1912년 자이스 작업장은 스웨덴 의사인 알바르 굴스트란트(Allvar Gullstrand)의 활약에 자극받아 안경 및 안과용 측정 장비 개발로 눈을 돌렸고 1908년부터는 측지 장비가 가세하면서 자이스 작업장의 제품 포트폴리오는 한층 더 다양해졌습니다.

    제품 포트폴리오의 확장으로 생산 시설 확충 및 인력 보강도 이루어져 1914년 6월 자이스 작업장의 직원 수는 5,280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민간용 장비 제작에 제동이 걸렸고, 거의 모든 인력과 시설이 군용 광학 장비 및 기타 장비 생산에 동원되었습니다. 오직 ”천문” 부서만이 포츠담-바벨스베르크 천문대에 설치될 유럽 최대의 반사 망원경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군비 제한으로 인해 자이스 작업장은 정밀 계측학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발족된 부서는 단기간에 단순 계측기뿐 아니라 나사선, 공구, 기어 등을 측정할 수 있는 복잡하고 강력한 장비를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한 이후 20년간 다른 제품 그룹에서도 다양한 물리 및 화학 이론을 토대로 새로운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자이스 작업장에서 예나의 과학자들은 장비 사용자의 발상을 현실화하는 데 거듭 성공했습니다. 현미경 제작 분야에서는 백색광뿐 아니라 자외선을 활용하는 한편, 발광 현상을 활용하여 표본 구조의 대비를 개선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위상차 기법이 개발되고 편광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응용 분야가 열렸습니다. 특별 개발된 카메라 덕분에 더욱 간편하게 현미경 이미지를 포착하고 문서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뮌헨의 국립 독일 박물관에 건설된 최초의 플라네타리움이 여러 민간 부문의 관심을 사로잡으면서 전 세계에서 주문이 폭주했고, 1930년대 말까지 시카고, 밀라노, 필라델피아, 도쿄 등지에 21개의 플라네타리움이 건립되었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는 민간용 장비 생산이 지배적이었지만 당시 정밀 공학 및 광학 분야에서 거둔 성과는 민간용과 군사용으로 활용하기 모두 적합했기 때문에 예나의 자이스 작업장은 군사용 장비를 개발하는 일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자이스 작업장은 신제품 개발을 통해 급성장하던 전 세계 군사용 장비 시장에서의 입지를 유지하는 데 힘썼습니다.

    나치 독재 치하에서는 자이스 작업장의 과학적 역량과 생산 역량이 독일의 군사용 장비에 집중되었습니다. 비행기, 잠수함, 탱크, 총기에 자이스 작업장의 기기가 장착되었습니다.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 이후 연합군은 자이스 작업장에도 나치의 침략 전쟁 준비와 감행에 기여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자이스 작업장을 장악한 미군은 특허, 설계 문서 및 특수 생산 장비를 징발해 갔습니다. 미군이 수뇌부의 전문가들을 서독의 하이덴하임으로 추방하면서 자이스 작업장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946년과 1947년에는 소비에트 점령군이 모든 생산 장비를 해체하고 과학자, 엔지니어, 전문 인력을 소련으로 추방했습니다.

    1948년 6월 1일, 독일경제위원회(DWK)는 전시에 무기 제조업체로 활동했다는 이유를 들어 칼 자이스 재단의 산업 자산을 국유화했습니다.

    이후 기업적 특성을 잃은 칼 자이스 재단은 주로 사회, 문화적 문제와 관련된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원문: 1996년 튀링겐의 지역 정치 교육 센터(Regional Center for Political Education)가 발행한 간행물에 수록. 원문 저자인 볼프강 뮐프리델(Wolfgang Mühlfriedel)과 에디스 헬무트(Edith Hellmuth)의 배려 깊은 동의를 얻어 이곳에 재수록)

  • 1946 - 1989

    독일에 자이스 그룹 공장 2곳 설립

    1947년 여름, 예나의 생산 시설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1946년 10월 4일, 예나 경영진의 승인으로 오버코헨 자이스-옵톤 광학 작업장(Zeiss-Opton Optische Werke Oberkochen GmbH)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던 예나 기업인 오버코헨 옵톤 광학 작업장(Opton Optische Werke Oberkochen GmbH)의 지원으로 하이덴하임에 자이스 그룹(Zeiss Group)이 창립되었습니다.

    예나 공장의 국유화 이후 오버코헨의 직원들은 미국인들이 연합군 점령 지역 내 칼 자이스 재단의 자산을 몰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오버코헨의 경영진은 서독의 뷔르템베르크주에 재단을 재창설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결정에는 칼 자이스 재단이 더 이상 예나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아베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1949년 2월 23일, 뷔르템베르크 주정부는 재단의 법적 주소를 서독의 하이덴하임에 등록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1951년 1월 15일, 칼 자이스(Carl Zeiss)라는 회사가 하이덴하임 지역 법원의 상업등기에 등록되었습니다. 당초 정밀 기계 및 광학 제품만 판매하던 칼 자이스는 1953년 10월 1일 자이스-옵톤을 인수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자이스 공장은 기존 제품 생산을 재개했습니다. 또한 과학자와 설계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분야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거둔 대표적인 성과로는 전자 현미경과 모스크바 인근의 핵연구소용으로 개발한 핵 분석용 현미경을 들 수 있습니다. 칼 자이스와 자이스-옵톤은 다시 대형 천문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나의 천문 부서는 타우텐부르크와 함부르크의 천문대의 의뢰로 플라네타리움와 2m 크기의 망원경을 제작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오버코헨에서 150mm 쿠데식 굴절계와 650mm 굴절기가 생산되었습니다.

    생산 라인이 갈수록 유사해짐에 따라 자이스의 두 공장은 독일과 국제 시장에서 경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두 공장 모두 예나의 칼 자이스와 칼 자이스 재단이 1945년 이전에 독일과 기타 국가에서 획득한 상표권을 주장했습니다. 오버코헨 경영진은 하이덴하임/오버코헨 공장만이 상표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견을 고수했습니다.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던 예나의 칼 자이스가 1945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상표로 국제 시장에 제품을 판매했기 때문에 1954년 봄 오버코헨 공장과 예나 공장 사이에 극렬한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71년에 이르러서야 두 공장은 런던에서 각자의 생산 장소, 즉 예나나 오버코헨을 제품에 적절하게 명시하는 조건으로 서로 구체적으로 합의한 시장에서 칼 자이스라는 이름과 렌즈 상표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합의안에 도달했습니다. 이를테면, VEB 칼 자이스 예나는 동유럽 국가, 시리아, 레바논, 쿠웨이트에서 자사 제품에 합의한 상표를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칼 자이스 오버코헨은 서독, 서베를린, 베네룩스 3국, 이탈리아, 그리스, 미국에서 칼 자이스라는 상표로 제품을 유통할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진 전자 및 정보 기술의 발전 덕분에 광학 기기 설계 분야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광학, 정밀 기계 및 전자 공학의 원리를 조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기능을 갖춘 제품이 탄생했습니다. 예나 공장과 오버코헨 공장 모두 이와 같은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장비 설계에 이 같은 조합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은 두 공장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칼 자이스 오버코헨은 강력한 전자 및 IT 기술을 보유한 덕분에 개발로 세계 개발 시장에 진출하는 데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던 반면, VEB 칼 자이스 예나는 동독이나 다른 동유럽 국가로부터 유실되거나 결함 있는 제품을 보충하기 위해 값비싼 솔루션을 자체 개발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관을 기술 혁신의 기회로 삼은 VEB 칼 자이스 예나는 1964년 사상 처음으로 산업용 레이저가 사용된 레이저 마이크로 스펙트럼 분석기를 구현하거나 1970년대 중반 최초의 산업용 전자 빔 노광 장치를 개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우주 연구와 마이크로 전자 공학 분야의 기술 발전은 칼 자이스 오버코헨과 VEB 칼 자이스 예나에 새로운 도전이 되었고 칼 자이스 오버코헨은 전자 공학 산업에 마이크로 전자공학용 광학 기기를 공급했고 VEB 칼 자이스 예나는 마이크로 전자공학 기술용 장비를 생산했습니다.

    1987년 VEB 칼 자이스 예나의 직원 수는 32,378명이었고 칼 자이스 오버코헨의 직원 수는 8,278명이었습니다.
    과학 및 기술 분야에서 두 공장의 입지가 유사했음에도, 직원들은 완전히 다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서 일했던 것입니다.

    1960년대 이후 궁극적으로 모든 산업 부문 제품을 망라한 칼 자이스 연합체의 구심점이었던 VEB 칼 자이스 예나는 중앙 경영 조직에 합병되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앙 경영 조직은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결국, 1989년 가을 이후 동독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자 합병된 VEB 칼 자이스 예나는 해체 수순에 접어들었고 1990년 6월 말에는 민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예놉틱(Jenoptik GmbH)과 칼 자이스 예나(Carl Zeiss Jena GmbH)가 신설되었고 이후 칼 자이스 오버코헨이 칼 자이스 예나를 인수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가 칼 자이스 그룹에 합병된 시점은 서방 세계의 정밀 공학 및 광학 산업이 불경기에 허덕일 때였습니다.

    그 결과 칼 자이스 예나는 동유럽이 겪은 구조적 변화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최악의 불리한 여건에서 새로운 국제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1990년과 1995년 사이에 상당히 많은 칼 자이스 예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1995년부터 칼 자이스 예나가 클리어 컷 비즈니스 부문을 담당하면서 칼 자이스 그룹 내부에서 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원문: 1996년 튀링겐의 지역 정치 교육 센터(Regional Center for Political Education)가 발행한 간행물에 수록. 원문 저자인 볼프강 뮐프리델(Wolfgang Mühlfriedel)과 에디스 헬무트(Edith Hellmuth)의 배려 깊은 동의를 얻어 이곳에 재수록)

  • 1990 - 2000

    칼 자이스의 위기와 변화:

    재결합 이후 수년간에 걸친 재건
    기업 매각에 대한 두려움
    동독의 불확실한 미래

    1991년 10월, 칼 자이스 예나가 창립되었을 때 남은 2,800명의 직원은 희망 차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문량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면서 회사의 수익이 예상치였던 2억 마르크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 해의 운영을 마무리한 1992년 9월 30일 칼 자이스 예나의 총매출은 1억 100만 마르크에 불과한 반면, 같은 기간의 손실은 1억 4,600만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일자리를 확보할 목적으로 제품 라인과 비즈니스 부문을 인수하려했던 예나 경영진의 압박이 거셌지만 칼 자이스 오버코헨은 서독의 감축 인력을 그곳으로 옮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1993년 10월, 2년 연속 실적 부진이 이어지자 예나 경영진은 1994년 1월까지 직원 수를 2,000명으로 감축하기로 한 노동자 협의회와의 합의안을 발표했습니다. 예나 공장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불안했습니다.

    경쟁 관계에서 공조 관계로: 동독 팀과 서독 팀 사이에 나타난 협력의 징후

    회사는 공식적으로 재결합했지만 조직과 전략 문제에 관련한 회사 내부의 진통은 여전히 극심했습니다. 함께 일한다는 계획은 일종의 경쟁으로 변질되었고 동독 팀과 서독 팀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지속했습니다.

    특히 사진 측정 장비나 측지 장비와 같은 비교적 비슷한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칼 자이스 예나와 칼 자이스 오버코헨의 경쟁이 심화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여러 사업 부문에 걸쳐 동독 팀과 서독 팀의 상호 보완적인 제품 라인 통합이 시작되었지만 진척이 쉽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내부 경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공장이나 서독 공장 중 한 곳이 해당 비즈니스 부문을 완전히 포기하는 방법 말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령 계측기 사업 부분의 경우, 예나에서 생산되는 장비는 현대식 컴퓨터 공학을 기반으로 하는 오버코헨의 3차원 좌표 측정 기술보다 훨씬 더 열등했습니다.

    서독의 칼 자이스 오버코헨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장비를 개발하는 일을 이미 오래 전에 중단한 상태였지만 칼 자이스 예나는 지나치게 높은 장비 생산 비용으로 인해 정밀 측정기 제품 라인 생산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와 칼 자이스 오버코헨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살린 프로젝트가 계속 성공을 거두면서 서로의 장단점이 명확해지자 칼 자이스의 핵심 비즈니스를 합병하기로 합의했으며 얼마 안 가 두 회사가 완전히 합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칼 자이스 많은 직원들이 알고 있는 시너지 효과 사례로는 안과용 진단 장비 분야가 손꼽힙니다. 두 회사가 힘을 합치면서 당시의 그 어떤 경쟁 제품보다도 훨씬 더 우수했던 SL 120 세극등이 탄생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의 매출은 목표의 절반을 겨우 넘기는 수준(연간 매출 목표는 2억 마르크였으나 실제 매출은 1억 100만 마르크)에 그치자 양측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버코헨에서 약 350km 떨어져 있는 이사회의 불신이 커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서독의 칼 자이스 소속 직원들은 1990/91 회계연도에 이윤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예나 직원들을 비난했습니다.

    회사 운영이 2년 차에 접어들면서 매출이 50% 가량 늘어났지만 여전히 기대치에는 못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1993년 중반 이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최악의 침체를 경고했습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가 장기적으로 수익을 거두려면 비즈니스 부문을 늘릴 필요가 있었지만 당시의 경제 상황이 불안정했던 탓에 칼 자이스 오버코헨이 추가로 비즈니스 영역을 넘겨주었다가는 자칫 자사의 입지마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993년 8월 현미경 사업부의 개발 인력과 영업 인력 90명을 오버코헨에서 예나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결정이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실직의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한편, 칼 자이스 오버코헨의 직원들은 이것이 공장 폐쇄의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1993년 9월 8일 실무자 회의에서 현미경 사업부를 예나로 이전하고 이에 따라 오버코헨의 직원 400명 가량이 실직하게 될 것이라는 공식 발표가 나오자 노동자 협의회와 노동조합들은 극렬한 저항을 공언했습니다.

    10월 12일 예나에서 열린 실무자 회의에서 노사 관계 책임자인 엘크 리토브(Elk Littow)는 직원당 연간 60,000 마르크의 판매 실적으로는 회사를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직원 수를 2,000 명으로 감축할 수밖에 없다"고 공표했습니다.

    예나에서의 반응도 오버코헨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노동자 협의회는 일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직원들은 노동자 협의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직원들은 동독과 서독의 칼 자이스 경영진이 발표한 인력 감축 계획에 시위로 맞섰는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직원 대표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모략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실상에서는 날이 갈수록 동독과 서독의 직원들이 줄어든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 관계가 되었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비용 감축 방안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으며, 1994년 1월 마침내 2,000명으로 감축한다는 예나의 단계적 인력 감축 계획은 실현되었습니다.

    오버코헨에서는 조기 퇴직 제도, 임시직 조항 및 여파를 최소화할 만한 기타 조치를 통해 약 4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오버코헨 직원들은 현미경 전문 인력이 예나로 이동해야 하는 데다 그것이 마지막 인력 감축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전혀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1992~1994년은 내부 갈등과 사업 침체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기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수익 회복의 유일한 방법은 동독과 서독 사이의 협력뿐이라고 믿는 직원들이 점점 더 늘어갔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칼 자이스 내부의 재결합이 단지 정치적 과업일 뿐 아니라 경제적 필요성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재건기: 칼 자이스 개편의 시작

    회사 외부의 누군가는 재건 계획을 이행할 수 있는 자유 재량권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일례로, 재단 집행위원은 사장 겸 CEO에 적합한 인물로 지멘스(Siemens)에 재직 중이던 피터 그라스만(Peter Grassmann)을 미리 점찍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때 지멘스에서 의료 기술 분야를 지휘했던 물리학자 그라스만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열렸습니다. 지멘스에서 20,000명의 직원을 지휘하던 그라스만은 수직적 기업 결합, 다시 말해서 개발, 생산 및 영업 분야를 각기 독립적이면서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제품 분야로 개편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1994년 10월 내내 회사는 잦은 파업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그라스만과 처음 가진 긍정적인 회견 이후 노동자 협의회는 추가 공지가 있기 전까지는 더 이상 파업을 강행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애초부터 그라스만은 엄격한 감원 조치와 사회적 보상 계획만이 난관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몇 차례의 힘든 협상 끝에 결국 그라스만은 오버코헨에 위치한 칼 자이스 재단 위원회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1995년 2월 16일 칼 자이스 예나의 감사회로부터 재건 계획에 대한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주요 계획 중 하나는 비즈니스 부문 개수를 줄이고 회사의 모든 역량을 핵심 사업단인 소비자 광학, 의료 기술, 현미경, 광전자 장비, 산업용 측정기로 구성된 5개의 지주 모델로 개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비즈니스 부문과 생산 분야를 재정립하고 5개의 지주 사업단 가운데 하나에 배정해야 했습니다.

    수익성이 미흡하거나 칼 자이스의 핵심 역량이 발휘되지 않는 비즈니스 부문은 매각하거나 합작회사로 전환하거나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건 계획에는 사업단의 지속적인 수직적 기업 결합도 포함되었는데 생산, 판매 및 마케팅을 여러 개의 제품 분야를 포괄하는 중앙 집중식 서비스 사업부로 개편하는 대신, 모든 구성원이 특정 제품을 책임지고 운명을 함께해야 했습니다. 또한 칼 자이스 오버코헨과 칼 자이스 예나가 각자 전력투구할 수 있는 비즈니스 부문을 갖추는 일도 시급했습니다.

    그러나 칼 자이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헤쳐나가야 할 최대 난제는 여전했습니다. 그룹 내 2,600명의 직원 감축 계획을 이행하지 않고서는 재건 목표를 달성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 노동자 협의회 대표의 재건 계획 승인은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습니다. 1995년 2월 16일 감사회 회의가 일시적으로 유예되었지만 계획 승인을 거부하다가는 칼 자이스 예나 전체의 존망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직원 대표단은 650명의 추가 직원 감축 계획안(그 중 150명은 강제 퇴직)에 합의했습니다. 같은 회의에서 피터 그라스만 CEO는 향후 칼 자이스 예나를 지원하겠다는 조건으로 칼 자이스 예나의 경영팀에 합류했습니다. 미래의 비즈니스 분야 측면에서 칼 자이스 예나는 현미경, 의료 기술 및 측지 장비 분야의 개발 및 생산에 관한 주요한 책임을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칼 자이스 예나가 칼 자이스 그룹의 전 세계 수익의 1/4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한편 칼 자이스 오버코헨의 협상도 그만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스탈프 지역의 칼 자이스 인력 1,300명이 일자리를 잃는 것은 피할 방도가 전혀 없었지만, 1995년 5월 노동자 협의회와 노동조합은 천신만고 끝에 정리 해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재교육 및 고급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협상안을 타결했습니다. 80명의 직원이 일하는 보핑겐 공장은 그라스만의 급진적인 재건 계획 아래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1996년 7월 문을 닫았습니다. 직원들은 퇴직금을 받거나 오버코헨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칼 자이스의 회복에 반드시 필요했던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은 디터 쿠르츠(Dieter Kurz)의 지휘 하에 대대적인 확충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의 성공에 힘입어 디터 쿠르츠는 칼 자이스(Carl Zeiss AG)의 사장 겸 CEO가 되었습니다. 1995년 2월 오버코헨 시장인 피터 트라웁(Peter Traub)은 칼 자이스가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그라스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는데 서독의 칼 자이스 직원 대부분은 그의 의견에 공감했습니다.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은 전진: 150주년을 자축하는 칼 자이스

    헬무트 콜(Helmut Kohl) 독일 총리는 칼 자이스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칼 자이스는 고난의 대명사이자 독일 특유의 기회를 상징합니다"라고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1996년 11월 9일 예나 의회 객석에 모인 하객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칼 자이스는 독일 통일 이후에 발생한 대규모 실업 사태, 예나의 핵심 사업을 제외한 모든 자산 상실, 구조적 위기, 서독의 정리 해고 등 역대 최악의 위기를 모두 겪었습니다.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칼 자이스는 회사의 재결합을 확정했으며 1995년 무렵 재결합을 통해 새로 탄생한 그룹은 오히려 경제 부흥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기념일에 맞춰 피터 그라스만 CEO는 그룹이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돌파해서 다시 흑자 경영으로 돌아섰다고 발표했습니다. 칼 자이스가 진정 "번영하는 기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공언했던 재단 집행위원 헤르만 프란츠(Hermann Franz)의 말이 더 이상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흑자 전환: 칼 자이스 그룹의 재건 완료

    1995년 칼 자이스 그룹은 칼 자이스 예나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합의안에 동의했습니다. 1995년에는 그룹 전체에 걸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었습니다. 칼 자이스 그룹은 킬에 본사를 둔 안쉬츠(Anschütz GmbH), 메디진게래테바우 베를린(Medizingerätebau Berlin GmbH), 1973년 이후 칼 자이스 오버코헨 소유가 된 미국 회사인 티트무스 옵티컬(Titmus Optical)로 분사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칼 자이스는 다른 회사와의 협력 관계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오버코헨에 자이스 엘트로 옵트로닉(ZEISS ELTRO OPTRONIC GmbH)이 창립되어 다임러-벤츠 항공사(Daimler-Benz Aerospace)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다임러-벤츠 항공사는 칼 자이스가 찾고 있던 든든한 동반자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라이카(Leica)와의 합작회사로 설립된 레오 전자 현미경(LEO Electron Microscopy)을 비롯한 합작회사 투자도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반도체 같은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협력 관계 개발이 시장 입지를 제대로 넓힐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이런 새로운 전략은 재건 계획 첫 해부터 그 성과를 나타내 1993/94 회계연도에 4,000만 마르크에 그쳤던 반도체 제조 관련 광학 제품 매출이 1994/95 회계연도에 그 두 배인 8,000만 마르크로 급신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윤도 200만 마르크에서 1,700만 마르크로 급증했습니다.

    그럼에도 칼 자이스의 일자리는 재건 계획의 여파로 인해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1994년 9월 30일 15,545명이었던 직원 수는 정확히 1년 뒤에 13,575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동독과 서독의 칼 자이스 직원 대다수는 1995년에도 급진적 변화에 대해 전적으로 낙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대부분은 그런 급진적 해결책이 칼 자이스가 파산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1996년 5월 피터 그라스만 CEO는 재건 계획의 성공 여부와 관련해 아직 남아 있는 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기사를 칼 자이스 사보에 기고했습니다. 낙관적인 평가의 근거는 당해 회계연도의 상반기 보고서였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해 회계연도 상반기 7개월간의 신규 주문량이 전년 동기 대비 12% 늘었고 수익은 8% 증가했습니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발전은 반도체 제조 기술 분야의 놀라운 성장률에 힘입어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았습니다. 랩탑부터 '지능형' 냉장고에 이르는 모든 일상 제품에 마이크로 전자 공학 부품 사용 비율이 꾸준히 늘어나면서 칩 제조용 고성능 광학 제품에 대한 수요가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에 힘입어 이사회는 1996년 10월 1일부터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부를 독자적 사업단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96/97 회계연도에 칼 자이스는 수익이 약 200만 마르크로 급증하면서 1994년 위기 이후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칼 자이스 예나는 3,800만 마르크의 손실을 상쇄함으로써 최소한의 성공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1997/98 회계연도에 칼 자이스 그룹의 수익은 1,500만 마르크까지 증대되었으며 칼 자이스 예나는 손실을 전년 대비 50%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도체 기술 사업단의 성공과 더불어 산업용 측정기 사업단의 수익도 전년 대비 20% 가까이 증가한 4억 3,500만 마르크를 기록해 두르러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1998/99 회계연도에는 동남아시아의 장기적인 경제 위기로 인해 반도체 사업의 수익성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이에 1998년 10월 피터 그라스만 CEO는 모든 칼 자이스 직원들에게 가급적 비용을 절감하라고 호소했지만 불가피한 비용마저 막을 방도는 없었고 결국, 1999년 상반기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의 수익은 크게 감소했습니다. 신규 수주량은 50% 가까이 급감했고 수익도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제 위기로 인한 반도체 시장 붕괴에도, 그룹의 다른 사업단이 반도체 기술 사업단의 손실을 사실상 전액 상쇄하면서 칼 자이스는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칼 자이스 내부에서 훨씬 더 유연하게 운영되는 '인력 시장'에 기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과거 반도체 분야의 엄청난 주문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칼 자이스 내부의 다른 사업단으로부터 직원들이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으로 전입해온 것처럼 이번에는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이 일부 인력을 다른 분야에 배치했던 것입니다.

    유연한 근로시간계좌제 역시 반도체 제조 기술 사업단이 변덕스러운 시장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회계연도 결산 결과, 수익 부진으로 약간의 적자가 기록되었습니다. 1999/2000 회계연도에 재건 계획의 지속적인 영향이 마침내 표면으로 드러났습니다. 칼 자이스 이사회는 4가지 성장 시장인 반도체/마이크로 전자 공학, 생명과학, 시력 관리, 산업용 측정기를 미래의 핵심 개발 분야로 지정했습니다. 칼 자이스 그룹은 전년 대비 22% 증가한 20억 유로의 총 수익을 거두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최대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칼 자이스 예나도 창립 9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재건 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칼 자이스 예나 직원들은 칼 자이스 그룹 직장 연금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월 1일자로 소급 적용). 같은 해 4월 칼 자이스 재단의 창립자인 에른스트 아베가 처음 도입했던 연금 계획에 몇 가지 큰 변화를 준 '직장 연금 2000(Pension Plan 2000)'이 도입되었고 이후, 일부 연금 조항은 총 수익과 직결되는 반면, 다른 연금 조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입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는 신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칼 자이스 예나는 차세대 세극등을 개발하는 동서독 공조 프로젝트의 성공에 이어 담당 분야, 특히 시력 관리 분야에서 계속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령 백내장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치료법인 개별 렌즈 삽입술과 관련해 1999년 칼 자이스 예나는 자동화 위주의 비접촉 공정을 통해 안구 내 렌즈를 측정하는 데 필요한 모든 관련 계산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한 장치인 IOLMaster를 출시했습니다.

    2000년 말 피터 그라스만은 기존의 계약 내용대로 CEO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칼 자이스는 1994년의 극심한 위기 이후 다시 한 번 정상궤도에 들어서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성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발췌: 스테판 패트로브(Stephan Paetrow), "유유상종: 칼 자이스, 재결합 이후 20년(Birds of a Feather: 20 Years of Reunification at Carl Zeiss)" 2011년, Hamburg)

  • 2001 - 현재

    통합으로 가는 길 - 재결합 10년, 칼 자이스

    칼 자이스 반도체 사업부(Carl Zeiss SMT)와 칼 자이스 의료기기 사업부(Carl Zeiss Meditec) 설립

    컴퓨터와 휴대전화부터 네비게이션 장치와 평면 TV에 이르기까지 칼 자이스의 기술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일상 제품이 존재하지 못했을지 상상만해도 놀랍습니다. 이런 모든 장치에는 디지털 세계의 ‘인공 두뇌’인 마이크로칩이 사용됩니다. 수 평방 센티미터 크기에 불과한 첨단 프로세서와 메모리 칩에는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기계적 방법만으로 이런 부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첨단 칩은 광학 시스템을 활용해 제조됩니다. 리소그라피(lithography)로도 불리는 이 공정에는 기술적인 한계를 무너뜨리는 렌즈가 사용됩니다.

    2001년에 10월 1일 칼 자이스에서 시작된 반도체 사업부 SMT(Semiconductor Manufacturing Technologies, 2010년 12월 31일부터 SMT로 운영)는 전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대물 렌즈를 제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 중 하나입니다.

    본사로부터 2km 거리에 있는 오버코헨-쾨니크스브론에 반도체 칩 제조에 사용되는 광학 시스템을 독립적으로 제조하는 시설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칼 자이스는 2006년 10월 공식 가동에 들어간 세계에서 가장 현대화된 이 시설에 총 4억 5,000만 유로를 투자했습니다. 오버코헨-쾨니크스브론 공장에 대한 투자는 칼 자이스 그룹의 단일 자본 투자로는 금액 면에서 역대 최대에 해당합니다.

    오버코헨에 칼 자이스 SMT를 설립하던 당시 칼 자이스 예나 경영진은 예나와 미국의 더블린에 또 다른 독립 회사를 창립해 핵심 사업 분야인 안과용 장비 사업을 개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2001년 말 칼 자이스와 예나에 본사를 둔 아슬레피온-메디텍(Asclepion-Meditec AG)은 안과 사업을 합병하고 칼 자이스 메디텍(Carl Zeiss Meditec AG)을 새로 창립하는 한편, 프랑크푸르트 주식 시장(Neue Markt)에 상장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칼 자이스의 책임 하에 운영되는 주식회사인 SMT와 메디텍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룹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창립된 칼 자이스 IMT(Carl Zeiss IMT GmbH) 및 칼 자이스 마이크로이미징(Carl Zeiss MicroImaging GmbH)과 같은 신생 기업은 칼 자이스 재단 개혁의 일환으로 2004년 그룹 전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반도체 기술과 의료 기술 분야의 ‘개척자들’이 거둔 성공의 수혜를 입었습니다.

    재결합 과정의 핵심: 2004년 칼 자이스 재단 개혁

    회사를 운영하고 모든 사업을 관리하며 자산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재단(‘기업 신탁 재단’이라고도 불림)은 독일법상 가장 보편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기업 신탁 재단은 회사의 실제 주주 역할을 하는 ‘주식 보유 재단’과 달리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1896년 아베가 정한 사내 규정에 명시된 기업 신탁 재단의 법적 구조를 계속 고수했던 칼 자이스와 쇼트(SCHOTT)의 경우, 회사법에 따른 특수한 지위 때문에 특정한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첫째, 재단 기업은 파트너 기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비즈니스 활동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영향력도 직접 행사하지 못합니다.

    과거 칼 자이스와 쇼트가 여러 가지 경우에서 상호간의 법적 책임으로 이득을 누리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는 상당한 위험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한 회사가 도산하면 나머지 회사마저 함께 무너질 수 있는데, 재결합 이후 칼 자이스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면서 이런 위험이 망령처럼 또 다시 나타났습니다. 재단 집행위원이 맡은 역할은 두 번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즉, 재단 집행위원은 두 회사의 단독 감독기구 역할을 하는데 그 업무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칼 자이스와 쇼트는 업계와 정치계 출신의 핵심 인물들로 구성된 감사회에 의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칼 자이스 재단의 법적 지위 역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국제 시장에서 이런 유형의 재단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감사회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은 상황에 맞물린 이러한 현실 때문에 칼 자이스와 쇼트는 해외에 자회사를 설립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를테면, 외국 은행은 칼 자이스 재단을 신용할 수 있는 재단으로 인정하기 않았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회사 규정의 특정 조항 때문에 두 개의 재단 산하 기업이 사업의 일부를 주식회사로 분사하는 방법 등을 통해 추가 자본을 이용할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회사의 법적 지위로 인해 발생했다기보다는 회사 규정의 조항 때문에 파생된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급변하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지속적인 투자와 혁신이 성공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런 상황은 두 회사가 다른 회사와 경쟁하는 데 있어 심각한 불이익으로 작용했습니다.

    2001년 11월 재단 집행위원 하인즈 뒤르(Heinz Dürr)는 재단 개혁으로 인해 칼 자이스가 제공하던 사회적 편익이 차츰 감소할지도 모른다는 직원들의 우려를 가라앉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기고했습니다. "아베였다면 당연히 사회적 대의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채 회사 규정을 현재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을 것입니다." 개혁을 옹호한 사람들은 당면한 현실을 뒷받침할만한 다양한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가령, 회사 규정으로 인해 앞으로도 칼 자이스 주식회사가 상장될 가능성은 배제된다는 등의 논리도 등장했습니다. '직장 연금 2000'으로 인해 이미 칼 자이스 회사 연금 계획의 일부에 그룹의 운영 성과가 반영되었으며 그와 같은 제도는 독일의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칼 자이스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감사회를 설립하는 일 역시 공동 결정 및 관리 측면에서 노동자 협의회에게도 유익할 것으로 전망되었습니다. 실제로, 칼 자이스 예나의 직원들은 이미 그와 같은 혜택을 활발하게 누리고 있었습니다.

    2004년 7월 1일자로 새로운 회사 규정이 발효되었으며 재단 산하의 두 회사, 즉 칼 자이스와 쇼트는 2003년 10월 1일 시작된 회계연도를 기점으로 소급 적용되는 독립적인 주식회사로 전환되었습니다. 두 회사에는 각자의 감사회가 발족되었고 칼 자이스 재단은 칼 자이스의 단독 주주 자격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회사와 관련해서 직원들이 지닌 법적 지위와 권리를 관장하는 조항이 새로운 회사 규정에 흡수되어 독일 내의 모든 직원에게 확대 적용되었습니다. 독일에 위치한 모든 회사의 직원들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칼 자이스를 재결합하는 데 필요한 법적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1948년 이후 사상 처음으로 칼 자이스 예나 직원들은 재단의 합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룹 전체의 입장에서는 창립 108년 만에 이뤄진 근본적인 재단 개혁을 바탕으로 1995년과 2000년 사이에 운영된 사업단의 재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칼 자이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난관 극복: 2009년 금융 위기와 2010년의 기록적인 한해

    2008년 봄과 2009년 봄 사이 유로존 국가의 산업용 제품 생산량이 20% 이상 급감했습니다. 다수의 독일 기업이 조업 단축 제도를 도입하거나 인력을 감축해야만 했습니다. 칼 자이스는 2007/08 회계연도에도 흑자를 기록했지만 그룹은 1년 만에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신규 수주량이 19% 가량 감소했고 수익 역시 23%나 급감했습니다. 그러나 예산 억제 조치(BCM) 프로그램을 시행해 적극적인 비용 절감 조치를 취하면서 2009년에는 수백만 유로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칼 자이스는 부정적인 시장 여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비용을 연구 개발에 계속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가급적 많은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칼 자이스는 그룹 노동자 협의회 및 독일 금속노동조합(IG Metall)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 상황을 극복할 일괄 조치"를 마련했습니다. 직원들이 각자 협의한 임금 인상액의 일부와 크리스마스 보너스 및 휴가비 같은 기타 재정적 장려금을 한시적으로 포기하는 대신 이사회는 2010년 9월 30일까지 강제 해고를 일체 시행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대신, 작업량이 급감한 분야에는 조업 단축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칼 자이스는 위기에 처한 시기에 여러 사업 부문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IT 부문 및 자동차 제조 산업과 같은 핵심 산업에 대한 의존도 때문에 주문량이 급감한 반도체 제조 기술 및 산업용 계측기 사업단이 어려움을 겪은 반면, 현미경 및 의료 기술 등의 다른 사업단은 어렵게나마 안정적인 운영을 유지했습니다.

    2009/10 회계연도를 살펴보면 칼 자이스가 위기에서 탈출했을 뿐 아니라 위기 이전(2007/2008 회계연도 수익 26억 유로)보다 눈에 띄게 많아진 약 30억 유로의 수익을 창출하면서 더욱 강한 기업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08/09 회계연도에 소폭 감소하기는 했지만 이듬해 칼 자이스의 지분 비율은 33% 수준에서 안정되었고 전년도에 1억 6,100만 유로의 손실을 기록했던 순이익 역시 2억 800만 유로로 크게 반등했습니다. 칼 자이스는 천신만고 끝에 회사 창립 이후 가장 성공적인 한해를 보내면서 놀라운 속도로 흑자로 전환한 것입니다.

    (발췌: 스테판 패트로브(Stephan Paetrow), "Birds of feather: 칼 자이스, 재결합 이후 20년(Birds of a Feather: 20 Years of Reunification at Carl Zeiss)" 2011년, Hamburg)